안녕하세요 모카빵순이입니다. 제주에서 서울로 교육 일정이 있어서 올라간 길에 하루 날 잡아서 찾게 된 종로구에 위치한 종묘입니다. 마치는 시간 1시간 전에 방문하였더니 문화해설사 선생님의 해설을 들으며 돌아보니 훨씬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봄의 따스한 햇살이 낮은 기와를 비추어주며 온기와 평화로움을 느끼며 유유자적하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은 종묘의 공간에서 행하던 제사의 의미도 돌아보게 되는 소중한 경험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세계문화유산 종묘를 둘러보다
서울시 종로구 종로3가역 11번 출구에서 200m의 위치하고 있는 종묘는 조선시대의 왕과 왕비, 그리고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죽고 나서 왕의 칭호를 올려 받은 왕과 그 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행하던 왕실의 사당입니다. 조선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는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른 뒤부터 종묘건설과 도읍지를 정하는 일에 무엇보다 더 큰 관심을 가졌고, 종묘는 왕조의 뿌리를 상징하는 시설입니다.
종묘는 창건 당시 대실이 7칸이었고, 대실 안에는 석실 5칸을 만들었으며, 대실 좌우에는 이랑 각 2칸씩 이어지었습니다. 그 주변에 담을 쌓아 담밖에는 신주 7칸, 향관청 5칸, 좌우행랑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 5칸을 지었습니다.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날을 받아 1395년 10월 4대조의 신주를 개성에서 옮겨와 봉안하였습니다. 종묘를 구성하고 있는 중심건물은 종묘 정전과 영녕전으로 태조가 종묘를 건설할 당시는 종묘 정전뿐이었는 데 영녕전은 세종 때 처음으로 건립되었습니다. 종묘 정문을 들어서면 거치고 널찍한 돌로 깐 세 가닥의 길이 길게 나있는 데 가운데의 약간 높은 길은 신향로, 동쪽의 낮은 길은 어로, 서쪽의 것은 세자로 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숙실은 재궁 또는 어재실이라고 하는 데, 왕이 목욕 재계하고 의복을 정재하여 세자와 함께 제사 올릴 준비를 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문화해설사의 선생님의 얘기를 듣다 보니 새삼 제사문화에 엄격한 절차를 갖추어서 정성을 다한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종묘제례 시대별 역사
삼국시대
선왕에게 제사를 지내 자손들의 복을 기원하는 행위는 원시시대부터 끊임없이 행해져 왔습니다. 이미 고조선의 건국신화에서도 그러한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단군신화에서 신단수의 명칭이 나오는 데, 이는 원시신앙의 집결지로서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이 지상으로 내려온 제사의 장소이었을 것입니다. 한국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가신앙을 보여주는 사례로, 천신에 대한 제사이자 동시에 시조에 대한 신앙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천신과 시조신에 대한 신앙은 건국초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삼국이 각각의 시조신에 대하여 독자적인 시조묘를 세워 매년 제사를 드렸고, 역시 각각의 독자적인 천신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시조 이하 역대 국왕들의 신주를 모시고 정례적으로 제례를 드리는 대상인 유교적인 종묘의 설립과 운영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가능하였다고 합니다. 고구려에서 종묘를 세웠다는 기록은 일찍부터 나오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천왕 21년 환도성이 전쟁으로 파괴되자 새로 평양성을 쌓고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제의 경우에는 종묘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으나, 백제가 고구려 유이민계통을 중심으로 국가가 건립되어 종묘는 운영을 했을 건데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신라에서의 종묘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2대 남해왕 3년에 시조인 혁거세의 묘를 세어 4계절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처음입니다. 22대 지증왕대에 시조가 내려와 태어난 마을에 신궁을 세워 제향 하였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
36대 혜공왕 때에 이르러 비로소 5 묘를 정하고 모셔진 신주는 김 씨 시조인 미추왕, 태종대왕, 문무대왕, 경덕왕, 성덕왕이었습니다. 이중 시조인 미추왕과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은 세대가 지나도 옮기지 않는 신위인 불천위로 설정되었습니다. 5 묘제는 '천자는 7 묘, 제후는 5 묘라는 '예기'의 원리에 입각한 것으로 당시 당에 조공을 보내고 책봉을 받았던 신라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0대 애장왕 2년에 이르러 변화하여서 이때 무열왕과 문무왕을 위해 따로 별묘를 건립해 봉안하고, 종묘에는 시조와 명덕대왕, 원성대왕, 혜충대왕, 소성대왕을 모셨고, 이것은 현왕의 4대조를 모시는 종묘제 원래의 모습으로 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애장왕대 이루어진 5 묘제의 내용은 이후 특별한 변동 없이 신라말까지 시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종묘제사는 '예기'에 근거하여 4계절의 첫 달 즉, 1월, 4월, 7월, 10월에 제사를 시행하게 규정되어 있고, 후한 이후 납일이 추가되어 5차례가 되었습니다. 이 중 5월 5일과 8월 15일의 제사는 조선시대에도 속절의 제사로 중시되었는 데, 그 기원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종묘제는 성종 7년 12월에 오 묘제를 정하였다는 기록에서 시작됩니다. 하나의 큰 종묘의 건물을 3개의 실로 나누고, 실은 다시 방으로 나누자는 '동당이실이방'제도인 것으로 여기서 건국한 이래 종묘에서 5대를 넘어진 신주를 옮겼던 조천의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데, 이때에도 역시 그것을 수정하기보다는 약간의 변형된 형태로 종묘제를 운영하도록 제기되었고, 고려의 종묘제는 형식상'천자는 7 묘, 제후는 5 묘'라는 원칙을 수용한 것처럼 표방했지만 실제로 건설된 종묘는 동당이실을 전제로 형제를 같은 세대로 간주하는 변형된 형태로 '소목제'를 운영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 종묘제향의 빈도는 크게 늘어났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6차례는 물론이고 속절이라 불렸던 정조, 단오, 추석, 동지의 4차례의 제사가 새로 추가되었고, 여기에 매달 초하루에 삭제를 보름날에 망제를 각각 시행하였고 아울러 이와는 별도로 새로운 과일을 얻거나 짐승들을 잡으면 수시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체제는 천자의 의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협제는 태조 4대조의 신주를 종묘에 모셔와 제사를 드리는 것이 미편하다는 이유로 각각 폐지되었고 영녕전의 경우 봄, 가을의 2차례에만 제사가 시행되었는 데, 같은 날에 종묘와 영녕전을 전부 제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이유로 국왕의 친제가 아닌 섭행으로만 운영되었습니다.
종묘 주변의 대한민국 사적지 소개
창경궁
조선성종 때 건축하였고, 창경궁 서쪽은 창덕궁과 붙어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종 14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하여 새로 중건하고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었고 숙종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장희빈을 처형한 일과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일, 정조가 승하한 일 등 궁중의 비극이 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창덕궁
창덕궁은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시대 궁궐로 동쪽으로 창경궁과 맞닿아 있습니다. 창덕궁의 후원은 한국의 유일한 궁궐후원이라는 점고 한국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경복궁
조선왕조이 법궁으로 1395년 창건되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습니다.
'경복'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운현궁
조선후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의 사가로 , 고종이 탄생하여 즉위하기 전 12살까지 살았던 잠저이고, 운현궁의 이름은 서운관(관상감의 별칭)이 있는 앞의 고개라 하여 '운현'이라 불렀습니다. 현재는 운현궁에 매화나무를 심어 한옥과 매화의 어우러진 모습이 봄의 정취와 어우러지는 곳입니다.
이번 서울여행을 가서 느낀 건 종묘 주변을 중심으로 오랜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시절을 돌아보게 되고 오래도록 제례의식을 이어와서 지금도 행하고 있다는 것과 일반 가정에서도 현재 제사문화에 대한 승계를 놓고 변화되는 의식을 보이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과거가 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서울을 가게 되면 꼭 한번 종묘 주변을 둘러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